서울의 북쪽.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 우이봉 봉우리에서 시작된 물길이 동북 4구를 가로지른다. 발원지인 우이봉이 소의 귀를 닮아 '소귀내'라고도 불린 우이천. 우이천 징검다리를 건너면 펼쳐지는 수유동에는 익어가는 가을처럼 우직하게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42번째 여정은 천천히, 물 흐르듯 자신자의 속도를 가진 서울 수유동으로 향한다.
추억이 머무르는 곳에, 50년 고택 카페
1970년대, 수유동이 수유리로 불리던 시절. 수유(水踰), 물이 넘쳐흐른다는 그 이름만큼 많은 외지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새댁 이현숙 씨가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수유동에 온 것도 그 즈음.
단독 주택 너른 마당에 나무를 심고 갓 돌 된 아들은 나무와 함께 자랐다. 봄이 되면 목련과 홍도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홀로 집을 지킬 때면 남편이 직접 만들어준 수은등을 켜고 밤을 맞았다. 현숙 씨에게 집은 닿는 곳마다 추억이었다.
하지만 사람 하나를 키우듯 쉼 없이 손을 타야 하는 고택. 홀로 고택을 관리하는 일이 버거워 잠시 떠나보기도 했던 그때, 돌연 타지로 떠났던 아들이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교수라는 번듯한 직업을 두고 어떻게든 이 집을 살려보고 싶었다.
그렇게 집 구조, 스위치 하나까지 살려 카페로 재탄생시킨 이들. 가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옛집이란 어떤 곳일까.
엄마가 생각날 때 청국장, 콩탕 한 그릇
완연한 가을, 소나무 가로수길 아래를 걷던 배우 김영철이 걸음을 멈춘다. 코끝을 스치는 청국장 냄새가 그윽하다. 입구와 분리된 주방 문 사이로 보이는 식당 사장님. 그 옛날 밥 짓던 어머니가 떠올라 자연스레 자리에 앉는다.
이 집의 대표 음식은 청국장과 콩탕. 알고 보니 이는 20년 전 위암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장님 한의순 씨가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음식이란다.
암을 이겨낸 후 '몸이 반응하지 않는' 음식을 고민하던 의순 씨에게 떠오른 엄마의 청국장. 그 시절 그 맛을 위해 그녀는 청국장을 위한 집을 구했다.
식당 인근 산을 병풍으로, 실개천이 보이는 작은 집. 한 달에도 수어 번 청국장을 빚으며 깨달은 건 단 하나. 음식에서 더하는 거보다 덜어내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20년째 여전히 가장 전통의 방식으로 청국장을 만드는 의순 씨. 큰 방에 이불을 덮어 삼 일 간 온도를 조절해 탄생시키는 청국장은 그녀를 살린, 그리운 어머니의 정이다.
40년의 기다림, 대한민국 1호 인장 명장
시작은 도장 판매의 명당이라는 구청 앞이었다. 3평이 채 안 되는 공간에서 40년 간 매일 찍어내듯 도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12년 전, 손님이 찾아오지 않을 곳으로 옮겼다. 간판도 없이.
최병훈 씨는 그곳에서 대한민국 1호 인장 명장이 되었다. 이젠 삼 일에 한 개씩 도장을 만들며 때론 한 달 반 넘게 한 개의 인장을 만들 때도 있다.
그의 작업실은 도장의 신세계다. 누가 의뢰하지도 않았건만 역사책을 공부하며 1천 개가 넘는 인장을 만들고, 또 만든다. 동물 인장, 바가지 인장, 임금의 인장...
그에게는 오랜 꿈이 있었다. 학자가 되어 실컷 글씨를 쓰는 일. 덕분에 나무 조각에 글을 쓰고 새기며 평생을 살게 됐다. 생계를 위한 도장은 이제 만들고 싶지 않았다. 40년 간 그를 버티게 한 건 바로 이 순간이다.
배우 김영철은 명장의 혼이 담긴 도장을 선물 받는다. 길 영 밝을 철. 그의 이름은 나무 끝에서 길이길이 밝은 빛을 낼 것이다.
철없이, 오래오래! 사계절 송편 떡집 부부
하늘 지붕 아래 장미원 시장 골목마다 가을바람이 분다. 좌판에서 계절을 느낄 때면 발걸음을 늦추는 배우 김영철. 문득, 조금 다른 방향으로 그가 멈춘다.
추석이 지난 지 어언 한 달 남짓. 한 떡집에 아직도 송편이 가득하다. 들어가 보니 갓 나온 송편, 송편들! 송편 맛 전국에서 알아주는 떡집은 겨울에도, 봄에도 송편을 찐단다.
그런데 유독 참 해맑아 보이는 남편. 얼마 전 아내 몰래 전원주택을 구입한, 큰 배포까지 자랑하는데. 이게 다 아내를 위한 보답의 선물이라고.
아내는 25년 전 1살, 3살 난 아이들을 두고 위의 절반가량을 절제해야 했던 남편을 믿어준, 세상 유일한 내편이었다. 회복 후 부부는 무일푼으로 떡집을 차렸다. 경험이 없었지만 자신은 있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힘을 합쳐 버텨낼 거라는 자신.
그렇게 부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남편은 그때의 시간을 보답하기로 했다. 서서히 나빠지는 아내의 건강, 그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마음을 담은 용화산 아래 전원주택으로, 부부는 이제 주말마다 떠난다. 그곳에서 부부는 선물같은 시간을 보낸다. 암벽등반 파트너로,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밀어주고, 받쳐주며, 앞으로도 오래오레.
서울의 산소 탱크, 북서울 꿈의 숲
서울 4개 구에 걸쳐 녹음이 펼쳐진 북서울 꿈의 숲이 푸르다. 서울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심 속 초대형 공원인 북서울 꿈의 숲. 광장, 분수, 연못 등 12경 풍경 명소를 품어 더 다채롭다.
배우 김영철은 북서울 꿈의 숲의 대표 명소, 49.7m의 전망대에 올라본다.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남산 등 서울 사방의 산세가 한눈에 보인다. 이 달이 지나면 완연한 가을의 정취가 빛으로 물들 것이다.
2009년 쇠락한 놀이공원 '드림랜드' 부지에 공원이 들어선 건 시대에 맞는 변화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북서울 꿈의 숲을 통해 소중한 휴식처를 찾았다. 매일 하루의 대부분을 꿈의 숲에서 보내는, 심탁일 어르신도 그중 하나다.
꿈의 숲 개장과 함께 그는 이곳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얼마 전부터는 이곳에서 독학한 피아노 연습에 열중이다. 삶의 위로가 절실했던 어르신에게 음악은 노년에 찾은 새로운 꿈이자 희망이다. 그리고 북서울 꿈의 숲은 오늘도 그 누군가의 꿈을 묵묵히 응원한다.
서울의 환경 실험, '제로 웨이스트' 가게
북서울 꿈의 숲을 떠나기 전, 좁은 골목을 지나는 배우 김영철. 한 가게 앞, 우유팩을 정리하는 젊은 여자를 발견한다. 무엇을 하는지 물으니 지구를 위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란다. 우유팩과 지구라, 무슨 일인지 가게로 들어가 본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눈에 띄는 건 비누와 빨대들. 수십 종의 물건들은 친환경 소재로 만들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결국 이 물건들의 목적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 쓰면 사라지는 고체 비누, 고체 치약은 포장 용기란 없다. 다회용 실리콘 빨대는 쓸 때마다 버려지는 일회용 빨대 쓰레기를 줄일 수 있다.
흔히 '제로 웨이스트 라이프'라 불리는 이 생활방식은 쓰레기를 줄이고, 나아가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세제 대신 재활용이 가능한 빈 용기에 세제 리필을 하는 것 또한 대표적인 실천 방안. 제로 웨이스트는 미래를 위한, 더 건강한 삶의 도전이다.
53년 이발소 부부의 행복 마라톤
동네 한 바퀴가 끝나갈 무렵, 이른 아침 우이천 징검다리 앞에서 했던 약속이 떠오른다. 배우 김영철과 짧은 인사를 나눴던 노장의 마라토너. 어르신의 말처럼 메달이 많은 이발소를 찾으면, 다신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물어물어 찾아온 이발소. 올해로 79세, 61년 경력의 이발사 김경철 어르신은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애처가란다. 결혼 50주년 기념 감사패 자랑부터, '또순이 복덩이' 아내의 소원이던 웨딩드레스 이야기까지.
53년 노부부의 사랑이 이렇게 뜨거울 수 있나 싶었는데. 천 리 건너 14일 만에 결혼한 부부 사이, 어찌 처음부터 순탄했을까. 쉰 세 번째 구간을 완주하기까지 부부는 두 손 꼭 잡고 셀 수 없이 많은 고개를 함께 넘었단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웃을 날만 남았다며, 다가올 80대가 기대된다는 부부. 53년 이발소 부부의 행복론은 숱한 세월이 쌓여 단단하고 그래서 더 소중하다.
견디고 참고 기다리며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동네, 서울 수유동 이야기는 10월 30일(토) 저녁 7시 10분에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