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낙화놀이가 열리는 아름다운 명소, 함안 '무진정'을 산책하며

야호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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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5. 19.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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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무진정 관광안내도

 

여행을 하다 보면 첫눈에 반해 탄성을 지르는 곳이 있는가 하면, 여행을 다녀온 후에 그곳의 진가를 오래도록 음미토록 하는 곳이 있다.

 

아마도 이번에 다녀온 함안 무진정은 후자의 경우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진정의 사계

 

무진정에는 5월 9일(월) 방문했는데, 아쉽게도 함안낙화놀이가 하루 전날인 8일(일)에 열렸다고 한다. 

 

9일 무진정에 도착했을 때 날이 저물어가고 있어, 다음날 다시 방문한다. 사실 처음 방문했을 때와 그 다음날 방문했을 때에도 '무진정'이 앞에 보이는 연못의 이름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데크로 된 길을 따라 가는데 언덕 위로 건물이 보인다

 

'관광지라면 제천에 있는 '의림지'정도 규모는 돼야 관광지라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크지 않은 연못을 보고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데크로 된 길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걷는데 언덕 위에 건물이 보인다. '저기는 어디지'하는 호기심에 건물이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무진정 입구

 

입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니 계단이 나오고, 그 옆에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함안 무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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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무진정은 1542년 조삼(趙參)선생(1473~1544)이 후진양성을 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선생은 17세인 성종20년(148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ㆍ창원ㆍ대구ㆍ성주ㆍ상주에서 지방관을 지냈고, 중앙에서는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다. 독서를 좋아한 올곧은 성격으로 성균관의 생원일 때 연산군 폭정의 주도적 역할을 한 유자광을 처벌하자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의 손자이다.

정자는 출입문인 동정문(東靜門)과 정면 3칸, 옆면 2칸으로 이루어졌다. 정자의 중앙에는 마루방을 두고, 양쪽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마루방과 툇마루에는 개방이 가능한 들문을 설치하여 공간 활용을 더하였다.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준다. 현재의 건물은 1929년 4월에 다시 지었다.

우리나라 최초서원인 소수서원의 창시자 주세붕이 무진정 기문을 지었으며, 무진정 정자 앞에는 함안낙화놀이가 열리는 연못이 있다.

 

안내문을 보니 '무진정'은 처음에 봤던 연못이 아니라, 바로 앞에 있는 '정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함안낙화놀이는 바로 무진정 앞에 있는 연못에서 열렸던 것이다.

 

출입문인 동정문(東靜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무진정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한옥 건물을 여럿 보기는 했는데 앞에 보이는 무진정은 무척이나 심플하면서도 시원하게 보인다. 

 

안내문에 나온 설명을 다시한번 살펴보니, 무진정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무진정은 정면 3칸, 옆면 2칸으로 이루어졌다. 정자의 중앙에는 마루방을 두고, 양쪽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마루방과 툇마루에는 개방이 가능한 들문을 설치하여 공간 활용을 더하였다.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준다.

 

이곳의 주인공인 '무진정!', 그리고 무진정 앞으로 보이는 연못... 심플한 구조의 무진정도 멋있고, 앞에 보이는 연못도 아름답다. '그래 여기서 봐야 연못의 진면목을 알 수 있구나!'

 

 

주세붕 선생이 지은 무진정 기문

 

무진정 울타리 안에 '주세붕 선생이 지은 무진정 기문'이 세워져있다. 찬찬히 글을 읽어 내려가는데, 입에서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주세붕 선생이 지은 무진정 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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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동녘으로 삼백 리를 치달아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가면서 말갈기가 떨치듯 물결이 용솟음치듯 함안의 진산을 이룬 것이 여항산이다. 그 한 가닥이 가볍게 날아오다가 십 리가 채 못 되어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 자주 빛 봉새가 새끼를 품은 듯한데 성이 그 위에 자리 잡은 곳이 함안 고을이다. 성산의 왼쪽 갈래가 꿈틀꿈틀 뻗다가, 서북쪽으로 굽어서 성난 말 같은 기세로 고을의 성을 에워싸고는 동쪽으로 청천에 이르러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고 고개를 치켜드는 것 같은 곳의 산마루에 정자를 지은 것이 무진정이다.

이 정자는 읍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인데, 곧 우리 조목사 선생이 거처하시는 곳의 동쪽 언덕으로 선생이 이 언덕에 처음 집을 지으신 것이다. 큰길가에 버려진 하나의 언덕이었고, 읍에서 사람의 왕래가 아주 잦은 곳이었다. 아라가야의 개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숨기지 않았고 땅이 감추지 않았지만은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이 하루에 천 사람, 만 사람이나 되는데도 이곳에 정자를 지을만한 좋은 자리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음을 듣지 못했다. 오직 선생은 한번 보고 이곳을 가려 잡목을 베어내고 집을 지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옛 길을 옮기고 아름다운 나무를 심어 중국 한나라의 숨은 선비 장후의 정원과 같은 길을 내어 꽃나무 대나무가 엉켜 하늘을 가리고, 나는 듯한 지붕이 기와가 높이 치솟았으며, 노비의 집들이 언덕 바깥에 늘어섰으니, 길 가는 사람들이 신선의 집인 양 바라보았다. 선생이 내게 이르기를 자신이 무진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달라"고 했다. 내가 선생을 매양 뵈올 때마다 문득 나를 인도해 올랐기 때문에 그 좋은 경치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 정자의 규모는 2칸인데 서쪽은 온돌방이요, 동북은 모두 창으로 되어있고 창밖에는 단이 있어 구슬 문빗장과 같으며 그 아래는 푸른 암벽이다. 큰 냇물이 남쪽에서 굽이쳐 흘러오는데 맑은 거울과 같고, 돌아 흐르는 것이 구슬 띠와 같아 부딪칠 때는 패옥소리 같으며, 암벽을 돌아 풍탄으로 흘러간다.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죽어 돌아갈 곳"이라 하셨다. 남쪽을 바라보면 산이 우뚝 솟아 하늘을 떠받치듯 하는데 정자와 마주하는 산이 파산이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눈에 천 리나 보이는 들에는 보리가 자라며 푸른 물결같이 하늘을 흔들고 곡식이 익으면 황금 빛 구름처럼 땅을 덮는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햇볕을 쪼일 수 있고 여름에 창문을 열면 더위가 가까이 하지 못하니 신선이 사는 곳의 자주빛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십주의 노을빛보다 낫다고 했다.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선생은 다섯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시다가 일찌기 귀거래사를 읊으시고는 이 정자의 높은 곳에 누워 푸른 산, 흰 구름으로 풍류의 병풍을 삼고, 맑은 바람, 밝은 달로 안내자를 삼아 증점의 영이귀 같은 풍류를 누리고 도연명의 글과 같은 시흥을 펴시면서 고요한 가운데 그윽하고, 쓸쓸한 가운데 편안하고, 유유한 가운데 스스로 즐기시면서 화락하게 지내셨다. 그 즐거움이야말로 많은 녹봉을 받는 높은 벼슬자리와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대체로 벼슬이 비록 영화롭기는 하지마는 욕됨이 따르는 것이므로 군자는 용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잠시 이 고을 일로서 말한다면 이방실 장군은 세상을 뒤엎을만한 충성으로 서울을 회보가여 우리나라를 참혹한 변란으로부터 구제하여 그 공적이 막대하였지만 살아서 횡액을 면치 못하였고 어세겸 정승 같은 분은 온 나라를 빛내는 문장으로 임금의 정사를 도와 많은 선비들의 기둥이 되어 그 명망이 더없이 높았지만 죽은 후에 또한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선생의 낙과 비교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선생은 이런 일들에서 보는 바가 있었음인가? 그리고 선생은 눈앞에 있는 산을 가리켜 죽은 후에 갈 곳으로 삼았으니 이 또한 천명을 아신 것이다. 천명을 알았기 때문에 능히 용퇴할 수 있었고, 용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능히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니 정자의 경치도 무진하고 선생의 즐거움 또한 무진한 것이다. 무진한 선생의 즐거움과 무진한 정자 이 경치가 모였으니 정자의 이름은 선생의 이름과 더불어 무진할 것이 분명하다. 선생의 휘는 삼(參)이요 자는 노숙(魯叔)으로 함안이 본관이며 같은 고을사람으로서 진실로 덕이 높은 훌륭한 어른으로 벼슬길에서는 청렴하고 근신한 것으로 명성이 드러났고 형제가 일곱 분인데 세 분은 문과에 급제하고 한 분은 진사시에 뽑혔으며 동기간에 우애로 서로 빛났으니 고을과 나라에서 이를 영화로운 명예로 여겼다.

내가 이 정자에 이름을 남기게 됨은 얼마나 다행이랴! 그러나 돌이켜보건대 오늘날 큰 문장가들이 위 아래로 어깨를 견주고 있으니 반드시 이 무진정의 의의를 남김없이 기록할 사람이 있을 것인데 나의 우매함을 무릅쓰고 기문을 짓는 것이 또한 외람되지 않겠는가? 사양하여도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니 우선 그 시말을 적어 드리는 바이다.

가정 21년(1542) 6월 지음
경신년(1800) 5월 현 기문 작성

 

수많은 사람이 이 앞을 지나갔지만 이곳의 가치를 몰라봤다는 말, 군자의 용퇴, 주세붕 선생의 겸손...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의 창시자 주세붕 선생이 지은 글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무진정에서 바라본 연못

 

무진정을 보고 나오니, 이제야 비로소 이곳의 가치를 알게 된 것 같다. 처음에 본 연못으로 이곳 무진정을 평가했으니, 나란 녀석... 얼마나 어리석은가!

 

 

괴산재

 

무진정을 나와 길을 따라 가니 오른쪽에 '괴산재'가 나온다. 

 

괴산재(槐山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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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의 한 사람인 정절공 조려(趙旅)선생의 손자인 무진정(無盡亭) 조삼(趙參)을 기리는 집의공파 종중의 재실로 괴항마을 서편 산기슭에 1670년 창건되어 300여 년간 여러번의 중수를 거쳤으며, 조삼 선생의 후손과 인근 청소년들의 교육전당으로 사용되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초가로 된 서당이 노후화 되어 불편을 겪었는데, 구한말 동헌의 목재가 매각되자 이 자재를 구입한 후 원래의 자리보다 조금 높은 곳에 터를 잡아 1899년 8월 27일(음력) 상략식을 했다.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았고, 걸출한 인재들이 이곳을 거쳐 갔으며, 학동들이 중심이 되어 격년제로 무진정에서 낙화놀이를 한 것이 경남도무형문화재 제33호 함안낙화 놀이의 시초이다. 차츰 신교육제도에 밀려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문중의 모임 장소와 시제를 모시는 공간으로 위축됐다.

건물이 산 중턱에 있어 이용하는데 여러 가지로 불편하여 옛것은 그 자리에 보존하기로 하고, 현재의 위치에 새 보금자리를 지은 후 1992년 5월 31일 괴산재라는 이름은 그대로 가져와 낙성식을 했다.

2020년 12월
함안조씨 집의공파 종중

 

괴산재는 안내문에 나와있듯이 '생육신의 한 사람인 정절공 조려(趙旅)선생의 손자인 무진정(無盡亭) 조삼(趙參)을 기리는 집의공파 종중의 재실'이다. 

 

 

괴산재를 나와 걷는데 주말에 열리는 전시회 현수막이 보인다

 

괴산재를 나와 다시 길을 따라 걷는데, 연못 바깥편으로는 주말에 열리는 전시회 현수막이 도로가에 걸려있다. 함안낙화놀이 이후에도 이렇게 주말이면 전시회 등 행사가 열리나 보다.

 

 

무진정 연못 주변을 산책한다

 

함안낙화놀이

 

연못을 중심으로 주변을 산책하다 '오횡목 군수가 함안낙화놀이를 보고 지은 시'를 발견한다. 

 

오횡묵 군수가 함안낙화놀이를 보고 지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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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은 점점이 저절로 오르내리는데
초저녁 성머리에서 모든 사람이 바라보네
불꽃나무 종횡으로 연이은 집에 서 있고
밝은 빛이 쏘이는 곳에 달도 오히려 희미하구나
찬란한 산호 같은 등불로 이루어진 장이 이날 열리니
한 성의 화목한 기운이 사람을 뒤따라서 오는 구나
붉은 빛은 꽃이 피어 봄이 머무는 듯하고
밝음은 별무더기 같아 밤은 돌아오지 않네
혹 바람이 불어 불꽃을 떨어지게 하더라도
달이야 무슨 상관있어 한 점의 구름을 싫어하리요
은혜에 젖은 지난날에 기이한 상도 많았으니
멀리서 장안의 대궐을 바라보노라

1890년 4월 8일, <<함안총쇄록>>에서

오횡묵(1834~?)
본관은 해주. 호는 채원(茝園)이다. 1889년 4월 21일 함안군수로 도착해 1892년 2월 26일 고성부사로 떠났다. 일기체 형식의 <<함안총쇄록>>을 남겼으며 정선군수, 자인현감, 고성부사, 지도군수로 있으면서도 <<총쇄록>>을 남겼다. 선정을 베풀어 1890년 6월 백성들이 비단에 이름을 수놓은 가리개를 바쳤고 1891년 2월과 8월에 조정에 유임을 요청했으며 1893년 2월 22일 선정비를 세웠다.

 

지역을 이동하며 근무했던 조선시대 군수가 낙화놀이를 보며 지은 시 한 수... 운치있지 않은가!

 

5월 8일 진행된 함안낙화놀이에 대해 함안군은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함안낙화놀이는 조선 선조 때부터 군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자 매년 사월초파일에 숯가루를 이용해 만든 낙화봉을 매달고 불을 붙여 즐기던 전통 불꽃놀이라고 한다.

부재료 없이 숯가루와 한지, 광목만을 사용 전통방식으로 연행하는 독특한 낙화놀이로 그 독자성을 인정받아 2008년 10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으며 낙화놀이용 낙화봉 제조방법은 2013년 특허청에 특허 등록된 바 있다.

KBS 드라마 '붉은 단심'에서 낙화놀이를 배경으로 찍은 촬영분이 방영돼 행사준비 기간 때부터 많은 관람객들의 관심을 받았다.

참나무로 만든 숯가루를 한지에 넣어 꼬아 만든 수천 개의 낙화봉이 타들어가며 붉은 빛이 꽃가루처럼 잔잔히 연못 위로 내려앉다가, 스치는 바람에 수만 개의 불꽃송이가 흩날리는 모습은 방문객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드라마 '붉은 단심'을 보며 낙화놀이를 본 기억이 난다. 드라마 속 그 장면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었다니!... 실제로 낙화놀이를 봤더라면 더욱 감동했을 것 같다.

 

 

연못 가운데 있는 정자

 

연못을 한 바퀴 돌아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온다. 연못 가운데에는 정자가 있어, 이곳 무진정 연못의 풍경을 한층 운치있게 감상하도록 해줬다.

 

연못 주위를 걷는데, 댕댕이와 함께 산책하는 반려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고즈넉한 봄날의 무진정 풍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되돌아보니, 그 모습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아무도 몰라봤던 곳에 이렇게 멋진 정자를 세운 조삼 선생, 지음(知音)이라 할 수 있는 주세붕 선생의 기문, 그리고 무진정 연못에서 열리는 함안 낙화놀이!... 무진정은 바로,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한 선비의 삶이 고스란히 후세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함안의 아름다운 명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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