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기생충>이 대한민국 101년 된 영화계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기생충은 아카데미(오스카)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을 받은 4관왕에 등극했다. 이로써 기생충은 세계 영화계와 국내 영화계에 새로운 전설이 되었다. 더불어 대한민국의 영화계가 새롭게 르네샹스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인구 5,000만 명 밖에 안되는 좁은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가끔 1천 만 명이 넘는 영화관객이 나온다. 그동안 1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영화가 벌써 18편이나 된다.
- <명량> 1,761만 명
- <극한 작업> 1,626만 명
- <신과 함께 – 죄와 벌 1,441만 명
그 외에도 국제시장, 베테랑, 도둑질, 7번방의 선물, 암살, 광해 왕이 된 남자, 택시운전사, 태극기 휘날리며, 부산행, 변호인, 해운대, 실미도, 괴물, 왕의 남자, 기생충 등이 1천 만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들이다.
그런데, 나는 관객수 330만 명인 뿐였던 <올드보이>라는 영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특이한 소재의 영화였고, 의미있는 영화였다. 내가 아는 한에서, 질문을 제대로 못해서 가장 고생한 사람은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역을 맡은 <최민수>씨다. 일본 만화 <올드보이>의 설정을 기반으로 이유도 모른 채 갇혀 지낸 남자가 자신이 감금된 이유를 알아내는 과정을 그린 2003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다. 2004년 칸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로는 18금 영화답게 영화 줄거리의 특이함과 유지태의 체조장면, 최민수의 망치 액션과 산 낚지를 먹는 장면 등 다양한 볼거리와 얘기거리를 만들어 줬던 영화였다. 영화의 원조인 미국에서조차 리메이크 되었던 영화다.
그런데, 영화가 마지막으로 치달을 때, 유지태(이우진 역)가 최민수에게 하는 대화가 혹 기억 나나요? " 당신의 진짜 실수는 대답을 못 찾은게 아니야. 자꾸, 틀린 질문만 하니까 맞는 대답이 나올리 없잖아.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가뒀을까? 가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란 말이야! "
잘못된 질문. 최민수는 15년간 본인이 갇혀있는 이유를 본인의 입장에서만 풀려고 했다. 나는 왜 갇혔을까? 그런데 정작 답은 그게 아니였다. 유지태가 왜 나를 15년만에 풀어줬을까? 그게 답이었다.
어릴 적 꼭 한번 씩은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질문이 있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분법적인 가장 단순 무식한 질문이다. 심약한 아이는 이 질문에 울기까지 한다. 질문을 하는 상대는 어른이고, 질문을 받는 상대는 선택권을 가진 자가 아니다. 아이는 엄마나 아빠 둘 중에 한 명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그 동안 아이가 살아온 모든 가치에 대하여 50%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아이에겐 누구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삶의 절반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당사자들은 웃으며 그 선택을 강요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우리는 늘 이런 질문에 익숙해져 있다. “이거 할래? 말래?” 중간은 없다. 좋던 싫던 하던지 말던지 결정을 해야 한다. 늘 사회에서는 그런 의사결정을 강요한다. PLAN A만 있지 PLAN B가 없다. 그러니, 성공 아니면 실패다. 한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기는 하늘에 별 따기다.
다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그 때는, 울음이 최선의 선택이다. 아이의 선택은 옳다. 이거 아니면 저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늘 술을 마신다. 늘 갈등속에 잔에 술을 채운다. 답이 없는 세상이다. 그래도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 어른들이 즐겨 쓰는 화법이고, 기업이 원하는 질문이다.
단답형 질문에 단답형 대답. 그렇게 학교에서부터 배워왔다. 하긴, 그렇게 답을 선택하도록 배우고 커왔으니 그럴 수 밖에. 다들, 4지선다형 인생들을 살았다. 직접 쓰는게 아니다. 늘 적당한 답을 골라야 했다. 늘 문제에는 함정이 있었고, 늘 그 문제에 있는 함정을 피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길은 늘 오답속에서 정답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사는 방법도 우리가 배워 온 것과 비슷해진다.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는게 아니라, 주어진 질문에 답을 하도록 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 문제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상대고, 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하며 살았다. 그러니, 삶이 힘들 수 밖에. 내가 살고픈 길이 아니었으니...
비효율적인 문제는, 비효율적인 답을 만든다. 다시, 아이에게 질문을 해 보자.
"아빠하고, 엄마 중에 누가 더 좋아? " 비슷한 질문인데도, 아이에게 선택권을 준다. 선택의 여지가 있다. 잘한 질문이다. 아이가 편하게 답을 할 수 있게 하는 질문이다. 하나를 버리지 않아도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만큼만 비율제로 대답하면 된다.
"아빠가 훨씬 더 좋아!" 울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때론 질문한 사람이 아이에게 더 점수를 딸려면 질문을 잘 해야 한다. 아이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아이가 창의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주변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상대의 입장이 아니라, 내 입장에서 질문하는 사람들. 내 입장에서만 답을 강요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만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건 융통성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까지 불편하게 한다. 가끔, 직원들에게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Negotiation. 흔히 우리가 얘기하는 <네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상대와 협상을 해야 하고, 무엇언인가를 서로 주고 받아야 한다. 그 과정이 네고다. 나는 <네가 가는 것>, 그것을 NEGO <네고>라고 한다. NEGO,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답을 주는 것, 그래야 답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답을 구해야 내가 정작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다.
질문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입장에서 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답을 받을 수 있다. 창의적인 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숨통이 트인다. 잘된 질문이 창의적인 사회를 만든다. 제대로 된 길을 찾도록 한다.
제대로 된 질문이 제대로 된 답을 구할 수 있다.
(주)피엘씨, 정석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