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적으로, 나는 지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올해 59살. 이미 고등학교 동창들은 현직에서 내려오거나 내려 올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이에 나는 다시 현업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내 나이또래의 사람들이 손자 손녀를 안고 있을 때에 나는 노트북과 서류를 들고 다시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되돌아보면, 나의 삶은 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삶이었다. 28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해서, 구로공단의 중소기업과 만도기계, 프랑스 톰슨 한국계열사 등 여러 직장을 옮겨 다니며 사회생활을 했었다. 전기, 전자, 섬유, 기계 등 다양한 업종의 회사에서 근무를 했었고, 구매, 외주, 관리, 생산, 기획, 영업 등 모든 부서를 섭렵했었다. 한 직장을 평생직장으로 삼으며 일하던 우리 세대의 친구들과는 참 많이 다른 삶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IMF가 끝나고 얼마 안 지난 2003년 6월에 개인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 설립 후 이전 회사에서 거래하던 외주업체 사장님의 사무실 한 칸에서 6개월을 얹혀 살았다. 그러면서 이전에 회사를 다닐 때의 구매경험을 바탕으로 조그마한 오퍼업체를 개업했다. 그래도 꿈은 커서,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2주 동안 집에서 머물며 향후 5년의 <중장기 사업계획서>를 <한글>과 <영문>으로 만들었다. 회사이름은 코소아 [KORSOA]라고 지었다. [Korea Sourcing Association]의 약자다. 지난 15년 직장을 다니며 구매업무를 한 경험에서 앞으로는 소싱이 대한민국의 미래라 생각했고, 여직원 한 명 없이 혼자 시작했으면서 미래에는 <협회>를 만드는 것을 꿈꾸었다.
2003년 모아놓은 돈도 없이 사업을 시작했던 나는 34평 아파트를 담보로 잡아 대출을 받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는 15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업을 시작하고나서 2~3년동안 매출은 거의 없었다. 내가 직접 구매이사로 있을 때 하고, 회사를 나와 혼자 뛰어 다닐 때 하고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손에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한 나에게 오더를 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뚜렷한 매출도 없이 지낸 3년, 돈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제 2 금융권에 대출을 신청했고, 금융회사에서는 보증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보증인을 아내로 올렸다. 금융회사에서는 보증인에게 고지의무가 있다며 내가 대출을 진행하는 것을 아내에게 알렸다. 그것이 2007년 추운 2월. 아내와 의왕에 있는 백운호수에서 자판기 커피를 먹으며 싸웠다. 어려울 때, 아내가 남편을 위로해 준다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얘기였다.
아내는 울며불며 1년에 집 담벼락 하나씩 뜯어먹으며 살았냐고 화를 냈다. 아내는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처남이 있는 회사에 가서 영업이나 하라고 했다. 할 얘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작한 거 끝을 보고 싶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내게 닥쳐 온 첫 번 째 시련이었다.
다행히 죽으란 법은 없었다. 2007년 하반기부터 현대자동차에 들어가는 <계기판>을 만드는 국내업체와 거래를 하게 되었다. 내가 만도기계에서 구매과장을 할 때, 나와 거래가 있었던 업체였다. 어느새 갑과 을이 바뀐 것이다. 우리 회사는 그 업체의 중국공장에 전자부품을 일괄해서 공급하는 업체로 선정이 되었다. 그리고 <구매대행계약>을 맺고 중국 천진에 있는 공장에 직접 전자부품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2007년 시작을 했을 때는 월 2,000만원 정도의 매출이던 것이 2012년부터 갑자기 월 5억원으로 매출이 급성장했다.
2012년부터 중국에서 현대자동차가 히트를 치면서 갑작스레 오더가 커지고, 그 덕에 5년 사이에 갑자기 매출이 10배로 커진 것이다. 그리고, 중국 공장에 이어 거래처의 인도 공장에 납품되던 전자부품까지 일괄해서 납품하게 되었다. 2012년부터 매출이 월 5억으로 올랐다. 직원도 2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급작스런 매출의 증가는 회사를 점차 알게 모르게 어렵게 만들었다. 매출이 커지면서 자금이 필요했다. 거래처에서는 2개월 재고유지를 요청했다. 익월말이던 결제조건은 점차 길어져서 마지막에는 5개월, 6개월로 늘어났다. 매출이 커지면서 고객사에서 주는 관리비는 5%에서 점차 3%, 4%로 줄었다. 중요부품을 공급하는 납품업체에서는 선T/T를 요청했다. 처음부터 자금이 넉넉한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매출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금운영이 어려워졌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매출의 100%를 만들어 주는 그 일을 그만할 수는 없었다.
2012년에는 <500만불 수출의 탑>을 받을 정도로 외형적인 규모는 커졌지만, 내실은 없었다. 해마다 은행으로부터 받는 대출을 늘려야 했다. 고객사에서는 주는 관리비는 3~4%인데, 은행이자는 5%가 넘었다. 점차 좀비기업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행히, 결제는 매월 중국과 인도에서 꼬박꼬박 들어와 현금유동성은 좋았기 때문에 은행돈을 빌리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2013년부터 새로운 사업을 찾아야 했다. 기존에 하던 사업 외에 새로운 수익원이 필요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공교롭게도 2013년 2월에 <지방암>이라는 희귀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옆구리에 있던 <지방덩어리>였는데,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암>으로 바뀐 것이었다. 수술을 집도한 병원에서는 암인지도 모르고 수술을 했고, 수술 후에 암으로 판정을 받았다. 결국 수술 후에 평촌 한림대에서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병원을 옮기고, 2개월 동안 매주 5일씩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매일 안양에서 신촌을 왔다갔다하며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병원에서는 5년이 지나야 완쾌 판정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암환자로 보내야 하는 5년간의 삶. 5년 후 나는 살아있을 수 있을까?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세브란스 병원을 왕복하다 갑자기 신규 비즈니스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물없이 감는 샴푸>. 병원생활을 하다가 얻은 아이디어였다. 몸을 못 가누는 환자들을 위해 물없이 머리를 감을 수 있는 샴푸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때부터 <물없이 감는 샴푸>를 개발하는 데 전력투구를 했다. 새로운 도전이었다. 기존에 하던 자동차용 전자부품사업과는 전혀 다른 <화장품> 부문이었다. 자동차부품을 구매하는 기존 고객사에게는 암수술 후 집에서 쉬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매일 회사에 나와 <물없이 감는 샴푸>를 개발했다. 그래야 <암환자>라는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내게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암수술을 받고 다들 건강을 챙긴다고 강원도로 들어갈 때, 나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로 했다. 내 삶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주변사람들을 통해 화장품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을 소개받았고, 디자인 업체와 홈페이지 만드는 업체를 소개받았다. OEM으로 샴푸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제품명과 브랜드, 제품과 용기 디자인, 포장 디자인, 홈페이지, 도메인, 화장품제조업체로 등록,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즐거웠다. 새로운 일과 내 브랜드와 내 제품을 만든다는 것이 뿌듯했다. 암도 잊을 수 있었다. 빨리 이 신제품을 만들어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기존의 자동차용 전자부품과 병행해서 매출을 만들어, 어서 회사를 안정시키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시장에서의 반응은 좋았다. 특허와 상표등록도 진행을 하고, 국내외 전시회에 적극적으로 참가를 했다. <물없이 머리를 감는다>는 컨셉에 모두들 신기해하고, 모두들 대박이 나겠다며 격려를 해 줬었다. 그러는 사이에 직원은 어느새 기존의 자동차부문에 2명, 신규사업에 3명, 총 5명으로 늘어났다. 인건비가 장난 아니게 늘어났다. 뿐만아니라, 제품생산, 마케팅, 국내외 전시회 참가, 각종 인증과 규격에 대한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기존의 자동차 부문 매출과 거기에서만 나오는 수익으로는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다양한 기관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차입을 했다. 점차 은행권과 정부기관 등을 통한 자금 차입이 늘어났고, 보증서를 받은 은행권에서는 무담보 대신 연 7% 이상의 이자를 요청했다. 계속해서 은행과 정책기관의 대출을 통해 자동차 부품에서 손해 보는 것을 메꾸고, 신규 비즈니스의 마케팅에 전력투구를 했다. 이른 시간에 신규 비즈니스에서의 매출이 필요했지만, 신규 비즈니스에서의 매출은 생각만큼 쉽게 오르지 않았다.
중소기업에서 자기 브랜드의 신제품을 만들고, 이를 마케팅해서 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따기였다. 상표와 특허를 획득하고, 온/오프라인 광고와 TV광고를 하고, 전시회에 가서 잠재 바이어를 만나 제품설명을 하는 일이 일상생활이 되었다. 회사를 폐업을 하기 전 5년 동안 전세계 32개국 434명의 잠재고객을 만났다. <중국>을 주요 수출대상국으로 전략을 짜고, <중국위생허가>와 중국내 상표등록을 했다. <아랍권> 수출을 위하여 <할랄인증>을 받았고, <브루나이>에 가서 제품설명을 했다. 미국 뉴욕에 가서 UN 조달제품으로 등록이 되기 위한 절차를 협의했고, 워싱턴에 가서 미국 국방장비업체들과 미팅을 했었다. 중국과 일본, 동남아, 미국, 유럽, 두바이와 이란 등 수 많은 나라들을 방문해서 전시회를 가졌다. 모두들 좋아했고, 모두가 새로운 컨셉의 제품에 열광했다.
2016년부터 베트남과 미국, 일본으로 조금씩 제품이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017년 중국으로부터 사드보복이 시작되었다.
사드보복으로부터 가장 피해를 본 부문이 <자동차>부문과 <화장품>부문이었는데, 회사의 주 비즈니스가 모두 그 쪽이었다. 중국에서의 현대자동차 매출이 반쪽나고, 화장품은 수입이 금지되었다. 이제 막 싹이 날려 했는데, 근간부터 잘린 것이다. 결국, 2016년 말에 최악의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2016년 말에 결산을 해 보니 업체들과 은행, 정책기관의 줘야 할 돈이 약 46억, 중소기업으로서는 도저히 갚지 못할 어마어마한 부채였다. 월 이자만 약 1,500만원. 매 월 들어오는 자동차 부문의 수익과 같은 금액이었다. 은행이자를 갚고 나면 돈이 다 떨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2016년 말에 결국 회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2017년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 동안 자동차부문 고객으로부터 받은 돈을 납품업체에 대하여 한군데씩 결제를 해주고 나니, 최종으로 남은 빚이 약 26억이었다.
마침, 그 당시 주변 지인들을 통해 알아보니, <개인회생>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회생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2017년 8월에 <개인회생> 절차를 시작했다. 법원에서 <잔존가치>가 더 크다고 회생절차를 개시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약 5개월간의 회생절차가 진행되었다. 채권자들로부터 33%의 동의를 구했지만, 결국 중진공과 신용보증기금에서 회생에 대한 동의를 안 해줘서 2018년 1월에 최종적으로 <회생불가> 판정을 받게 되었다.
결국, 2018년 2월에 회사를 폐업하고, 4월에 <파산 및 면책>을 신청했다. 파산을 신청 하고 약 7개월의 기다림 끝에 2018년 11월 23일에 <파산결정>을 받았다. 그 와중에 아파트가 경매로 팔려나가고, 나는 한 회사의 대표로서도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도 모든 것을 잃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법의 도움으로 올해 6월 21일에 최종적으로 <면책결정>을 받았다. 이로써, 지난 2017년 1월부터 2019년 6월까지 약 2년 반의 긴 시간이 마무리 되었다. 회생, 워크아웃, 파산, 면책, 경매 등 일반인에게 낯선 단어가 내게는 일상어가 되어있었던 지난 2년 반이였다.
그래도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서의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존재가 나를 살아남게 했다. 고등학교 동창이나 대학교 동창보다는 오히려 사회에서 만난 분들이 나를 더 많이 도와줬다. 기존에 거래처 사장님으로 계시던 분과 고등학교 동창이 집을 구하는 데 쓰라고 흔쾌히 1,000만원씩을 도와주셨고, 싱가폴 친구가 매월 200만원씩 컨설팅비라는 명목으로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늘 나를 지켜봐주고 위로해 주었던 20여 명의 지인들.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실망하지 않았고, 주저앉지 않았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네이버 밴드가 35개다. 그중에 애견밴드만 16개. <면책결정>이 된 후에 나는 그 모든 밴드에 <커밍아웃>(Coming Out)을 했다. 지난 2년 반 동안 나는 파산과 폐업과정을 거쳐, 이제 <면책>을 받게 되었다고. 많은 분들의 격려와 위로가 있었다.
내가 커밍아웃을 하자 많은 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외로 주변에 파산과 회생절차를 치르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나의 이야기를 통해 그 분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제는 밴드를 보고, 지방에서 조언을 받고 싶어서 올라오시는 분들도 계신다.
지난 6월 21일에 면책을 받고 나는 다시 살고 있다. 2019년 <경기도 온라인 강사되기 프로젝트>에 신청해서 지난 8월 7일에 최종합격을 했다. 온라인 강사가 되어서 내가 겪었던 경험을 청년들과 소상공인, 중소기업대표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왜 망했는지, 어떻게 운영해야 망하지 않는 지, 망해야 한다면 얼마나 스마트하게 망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지난 7월 28일에는 <사)한국엔젤투자협회> 21기 교육에 참가해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모두들 벤처에 투자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앞에 내 소개를 할 때,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부자인 당신들 옆으로 왔다고 했다. 나는 다시 재기해서 내가 번 돈으로 젊은 벤처들에게 투자를 하고 싶다. 내가 가진 경험과 노하우를 그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나는 지금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다.
지난 8월 19일에 2013년 2월에 수술받은 <지방암>에 대하여 더 이상 병원에 안 와도 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암에서 해방된 날, 나는 새롭게 <사업자등록증>을 낸 것이다. 첫 번째 창업은 90%가 망하지만 두 번째 창업은 90%가 성공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80%의 사업주는 결코 <재도전>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2년 반 동안 모든 것을 잃었지만, 나는 또 다시 만들어 가고 있다. 90%의 성공한 사람들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이제 다시 걸음마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넘어지지 않는지에 대하여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지에 대하여 알고 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시간도 아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지금의 내 모습을 누구에게라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신감이다.
최근에 나는 많은 것을 새로 시작하고 있다. 경기도 온라인강사와 엔젤투자자 교육수료, 그리고 재기성공프로젝트 등 모든 것이 재기하는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주변에서는 이런 나를 진심어린 마음으로 지원하고 있다. 나는 또 다시 사업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십여 년의 직장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회사를 만들었고, 연간 80억 이상의 수출도 해 봤다. 시장에 없는 신제품 개발과 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하여 암환자로 있는 5년 동안의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직접 다해 봤다. 성공도 해봤고, 실패도 해봤다. 그리고, <파산>과 <면책>을 통하여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나는 스타트업과 청년창업, 소상공인, 중소기업 대표들과 이야기 하고 싶다. 한번 넘어져서 못 일어나면 <실패>지만, 다시 일어나면 <실수>라는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싶다. 남들은 뒤로 물러설 때, 다시 앞으로 나가는 젊은 중장년이 되고 싶다. 그것이 국가에서 나를 <면책>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2019년 12월 11일에 나는 1천만원의 자본금으로 재창업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반려동물용 한방츄르>를 개발중이다.
이 사업으로 12월 말에 개인투자조합으로부터 5천만원의 투자를 받았고, 2020년 1월에 <벤처>로 등록이 되었다. 60살에 나는 벤처가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정부로부터 1억원 매칭펀드를 진행중이다. 추가 투자자도 기다리고 있고, 작년에 혁신적 실패사례 수상을 계기로 <2020년 재도전 성공패키지>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계획으로는 올 6월 안에 3.6억원을 모으는 것이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려동물사업으로 나는 반드시 재기를 할 것이고, <한방츄르>를 가지고 <박카스>나 <활명수> 등의 명품 브랜드로 만들 것이다. 중국과 일본, 미국으로 수출해서, 회사의 규모를 키울 것이다. 반려동물사업은 내게 제 2의 창업이고, 내게 제 2의 인생을 만들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