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반려동물 테마여행 2일차... 삼랑진 안태호 애견동반카페 '카페풍경'에서 단팥죽을 한 그릇 먹고는, 낙동강 뷰를 감상할 수 있다는 '작원관지'를 향해 출발한다.
'작원관지?'... 이름을 몇 번인가 되내어 보는데, 이름 부르는 게 쉽지 않다.
운전을 해 '작원관지'에 도착하니 넓은 주차장이 보인다. '넓은 주차장을 보면서 '작원관지'가 유명한 곳이구나'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주변을 아무리 봐도, '작원관지'가 보이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이 여기라고 했는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차장 위로 난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방문하려고 했던 '작원관지'가 모습을 나타낸다.
'도로를 따라 운전하고 왔어도 됐는데'... 작원관지 앞에도 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을 보며 '아마 저 건물이 '작원관지'겠지'하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에서 보는 건물은 '복원된 작원관'이며, 작원관의 원래 위치는 현재 위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정면에 보이는 작원관을 중심으로 왼쪽 위로 '작원관지위령탑'이 있고, 올라가는 두 갈래 길이 있다.
계단길을 따라 위령탑으로 올라가는데 앞에 '작원관 복원 기념비'가 보인다.
작원관(鵲院關) 복원(復元) 기념비
이곳 작원관은 옛날 원(院), 관(關), 진(津)의 역할을 겸하던 곳으로 교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군관민(軍官民) 300여명이 왜적 1만8천7백명을 상대로 결사항전(1592년 4월 17일)을 벌였던 전적지(戰跡地)로서 구국충혼(救國忠魂)들이 잠들어 있는 성지이며, 수백년 동안 피땀을 흘린 지역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러나 경부선철도가 개설(改設)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나 낙동강변에 그 터를 잡았으나, 1936년 대홍수(大洪水)에 휩쓸려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를 복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경운(耕雲) 송만술(宋萬述) 선생이었다.
선생께서는 작원관의 역사적 의미와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작원관을 복원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그 복원을 보지 못하고 타계(他界)하셨다. 뒷날 선생의 작원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지역민의 노력으로 지금과 같이 우뚝 서게 되었으니, 이를 기념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조국과 민족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선조(先祖)들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한 작은 의지로 이 비(碑)를 세운다.
삼랑진읍민일동
옛날 원(院), 관(關), 진(津)의 역할을 겸하던 곳이 '작원관지'라고 한다. 여기서 원(院), 관(關), 진(津)은 오늘날로 치면 숙박시설, 검문소, 나루터라 할 수 있다.
과거 작원관은 숙박시설과 검문소, 나루터 역할을 했던 교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작원관 복원 기념비'를 본 후 위로 올라가는데, 터널을 빠져나온 기차가 작원관지 앞을 지나간다.
낙동강, 기차, 작원관지... '낯선 이 모습은 뭐지?'... 이렇게 한 번에 강과 기차를 볼 수 있는 이 풍경이 낯설기만 하다.
"작원관지... 낙동강과 기차를 함께 볼 수 있는 멋진 곳인데!"
기차가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위로 올라가니,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듯한 '작원관지위령탑'이 나온다.
작원관(鵲院關)
이 산은 산세(山勢)가 험하나 경관(景觀)이 수려(秀麗)하고 유연(油然)하여 천태암산(天兌巖山)에서 고야산(姑射山)을 지나 불끈치솟다. 낙동강(洛東江)에 내려 꽂힌 바위산 한 굽이의 돌을 깨고 관도(官道)를 열어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요새(要塞)를 둔 곳으로 산이 높아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하여 까치 작(鵲)자를 따오고 여행하던 관원(官員)이 쉬어가던 역원(驛院)이 있어 원(院)자를 취하였으며 나루터(津)와 관문(關門)의 기능을 갖추었던 곳이라 이 권역(圈域)을 작원관(鵲院關)이라 이름하고 문(門)을 한남문(捍南門), 누(樓)를 공운루(控雲樓)라 편액(編額)하였다.
천태산(天兌山) 벼랑을 따라 난 잔도(棧道)는 매우 위험(危險)하여 몸을 구부려 내려다 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낙동강(洛東江)의 소용돌이 치는 물빛이 짙은 푸른빛을 띄고 두려움을 더하게 하는데 한 사람(一人)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萬人)도 당하기 어려운 우리나라 제일의 요해지(要害地)로 예전에 한 수령(守令)이 떨어져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있어 원추암(員墜巖)이라고도 부른다.
1592년 임진(壬辰) 4월 17일 아침에 동래(東萊)를 출발하여 양산(梁山)을 거쳐 침임(侵入)해 온 고니시(小西行長)의 왜병(倭兵) 제1군 1만9천7백명의 병력이 부장(副將) 마쓰우라(松浦鎭信)의 지휘로 오후들어 산의 위쪽 방향에서부터 내려다 보고 조총(鳥銃)으로 사격(射擊)을 가하며 달려들자 이곳을 방어(防禦)하던 밀양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晋)을 비롯한 군관(軍官) 이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 등이 관병(官兵), 민병(民兵)과 함께 분전(奮戰])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敗)하여 이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 이하 300여명이 목숨을 잃은 아픈 역사의 고전장(古戰場)이기도 하다.
2001. 9
'산이 높아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하여 까치 작(鵲)자를 따오고 여행하던 관원(官員)이 쉬어가던 역원(驛院)이 있어 원(院)자를 취하였으며 나루터(津)와 관문(關門)의 기능을 갖추었던 곳이라 이 권역(圈域)을 작원관(鵲院關)이라 이름하였다'... "아하, '작원관'이란 이름이 이렇게 지어졌구나!"
처음에 생소하게 들렸던 '작원관지'라는 이름...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알게 되니, 앞으로는 그 이름을 왠만해서는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다.
'한 사람(一人)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萬人)도 당하기 어려운 우리나라 제일의 요해지(要害地)'... 아마 영화 '300'에 나오는 지형처럼,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곳이 바로 '작원관'이었던 것이다.
위령탑 앞에 서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그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기차가 지나가는 낙동강변의 모습 위로 그 옛날 낙동강을 떠다녔을 배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과거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낙동강과 작원관은... 이렇게 오늘도 우리를 보듬으며 여기에 있구나!"
위령탑에서 '작원관'에 대한 내용을 읽은 후 경사진 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내려가며 다시한번 봐도, '낙동강과 기차'가 어우러진 이곳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또 한편으로는, '뜻깊은 유적지에서 반려견과 함께 산책도 하며,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작원관지를 둘러본 후, 처음 도착했던 아래쪽 주차장으로 걸어간다. 작원관지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않아, 오히려 아래쪽에 주차하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주차장에 오니, 작원관지를 둘러보고 와서인지, 주변 안내 간판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카페풍경에 들렸을 때에도 카페 입구에 '자전거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곳에도 '밀양 ~ 양산 자전거도로 출발지점'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낙동강을 따라 자전거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 이렇게 안내 푯말과 이정표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낙동강 뷰를 보기 위해 방문한 작원관지. 처음에는 '작원관지'라는 이름이 낯설게만 들렸다. 하지만 실제로 와 보니, 이곳 '작원관지'를 통해 삼랑진의 지형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낙동강과 기차, 그리고 아름다운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용맹함이 살아 숨쉬는 뜻깊은 곳... 그곳은 바로 밀양 삼랑진읍 역사 유적지 '작원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