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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뉴스/임실

[동네 한 바퀴] 전라북도 임실, 작은 위로들과 스쳐가다

  • 4월 23일 토요일. 저녁 19시 10분 KBS 1TV

 

전라북도에서도 가장 내륙에 위치한 곳. 임실은 순우리말로 '그리운 임이 사는 마을'이다. 오랜 기억 속의 임실은 왠지 소박하고 고요한 마을에 살 것만 같다. 이름처럼, 임실은 바로 그런 동네다.

 

시내도 산 아랫마을도 모두가 사이좋게, 비슷한 속도로 흘러간다. 하지만 마냥 심심하기만 한 건 또 아니다. 걷다보면 작은 동네마다 오직 임실만이 가진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수록 더 마음이 가는 동네. 동네 한바퀴 167번째 여정에서는 스쳐 가면 알 수 없었던 전라북도 임실의 시간들을 찬찬히 거슬러 가본다.

 

 

강물이 쉬어가는 곳, 옥정호 붕어섬

 

이른 아침, 국사봉 전망대에 오른다. 일망무제(一望無際). 끝없이 멀고 먼 운무가 산 골골마다 내려앉는다. 일교차가 큰 이맘 때, 운무가 발달한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장관이다. 부지런히 산을 오른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임실의 선물이다. 

 

날이 밝아오자 운무 사이로 섬진강 옥빛 물길이 드러난다. 진안 데미샘에서부터 달려온 물길이다. 그래서일까. 쉼 없이 흐르던 물은 잠시 옥정호에서 머문다. 숨고르기를 마친 강물은 곧 동진강 유역으로 향할 것이다.

 

호남평야의 젖줄이 되기 위해, 물은 이곳 옥정호에서 진로를 바꾼다. 옥정호의 중앙에는 붕어섬이 있다. 붕어섬은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에 호수 깊이 잠겨있다. 운무가 걷히며 금붕어의 형상이 점점 더 또렷이 드러난다.

 

임실군에 따르면 올해 다음 달 쯤 이 섬을 갈 수 있는 다리가 생긴다고 한다. 옥정호에 강물이 쉬다 가듯, 붕어섬은 조만간 좋은 휴식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섬진강 다슬기 잡는 사람들

 

3개도, 12개의 시군을 지나는 육백 리 섬진강은 어머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섬진강 주위로 나고 자란다. 봄볕 따라 바위틈 위로 올라오는 다슬기도 그 중 하나다.

 

섬진강 상류를 지나다가 강가에서 다슬기 잡는 주민을 만난다. 그는 임실의 토박이.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따라 이 섬진강변에서 다슬기를 잡았다.

 

당시엔 남녀노소 누구나 다슬기 채취가 가능했다. 다슬기를 잡는 법은 다양하다. 호미나 손으로 얕은 강물을 파는 것부터, 작은 배에 도구를 묶고 강바닥을 긁어 잡는 방식까지. 그는 보통 가슴까지 올라온 장화를 신고 물속에 들어가 '거랭이'로 다슬기를 잡는 전통 방식을 선호한다.

 

어깨에 건 도구를 한 번씩 털어낼 때마다 한 바구니, 다슬기가 쏟아진다. 한평생 이 동네 주민들은 다슬기 때문에 손에 물마를 날 없이 살았다. 그래도 다슬기는 섬진강변 사람들에게 참 각별한 존재, 요긴한 식재료다. 어머니 섬진강이 주는 무한한 사랑이다.

 

 

임실의 기적, 지정환 신부와 치즈테마파크

 

금성리 치즈마을을 지나면 근처엔 임실 치즈테마파크가 있다. 치즈숙성실, 체험관 등이 있는 이곳은 임실 치즈의 역사를 담아낸 장소다. 이곳에서 지정환 신부의 동상을 본다. 그는 1958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을 찾은 벨기에 출신 신부.

 

귀족 출신이던 그는 1964년 임실의 척박한 농토 앞에서 무기력한 주민들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양 2마리를 들여와 우유를 짰고, 그 우유를 오래 보존시키기 위해 1966년 이곳 성가리에 치즈공장을 세웠다.

 

이제 와 보니 말은 쉽지만 당시 한국엔 '치즈'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주민들 입장에선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치즈를 만들겠다는 이방인이 달가웠을 리 없다. 그럼에도 디디에 세르테벤스는 '지정환 신부'라는 한국 이름을 얻고 평생토록 이곳을 지켰다.

 

겨우 산양을 키워내고, 겨우 치즈를 만들어내고, 겨우 그 치즈를 한 호텔에 팔았다. 모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정환 신부는 포기하지 않아 결국 임실이라는 한 작은 동네를 치즈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수십 년 후, 임실은 이 동네만이 가진 고유의 이야기들을 큰 테마공원으로 꾸몄다. 바로 이곳, 임실치즈테마파크다.

 

모르고 갔다면 그저 잘 꾸며진 공원 정도겠지만 지정환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달리 보인다. 한 사람의 노력이 한 마을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임실 치즈가 있는 한, 지정환 신부의 정신은 이곳에 영원히 살아 빛난다.

 

 

마지막 터전을 꿈꾸며, 임실 치즈와 프랑스 가정식

 

치즈테마파크 시계탑 아래, 작은 빵집 하나가 있다. 임실에서도 보기 드문, 프랑스 가정식을 파는 식당이다. 들어가니 임실 치즈를 이용한 음식은 물론 직접 재배한 밀로 빵도 만든다는데.

 

아이 둘을 자연 속에서 키우고 싶어 귀농했다는, 젊은 부부의 고향은 둘 다 서울. 농촌 경험이 없으면 좀처럼 힘든 타향살이를 올해로 13년 째 하는 중이란다.

 

서울의 한 IT 기업을 다니며 만난 부부의 첫 로망은 지리산자락이었다. 그런데 가까운 임실이 그렇게나 살기 좋다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성수산자락 아래, 집을 지었다. 계획한 곳은 아니었지만 소문 그 이상으로 임실은 참 따뜻한 곳이었다. 모든 마을이 산 속에 오목하게 들어 앉아있는 느낌.

 

그래서 이제 부부는, 반평생을 넘게 살아온 서울보다 임실이 더 고향 같다. 요즘 임실 치즈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부부는 프랑스 치즈 요리에 삼매경. 매일 작은 주방에서 복닥복닥 옛날 빵과 가정식을 만든다. 인생에서 다시없을 행복한 순간. 부부의 시간들이 치즈처럼, 고소하게 흘러간다.

 

 

50년 햇빛 지붕 아래, 국수 공장 부부

 

읍내를 지나다가 한 독특한 집 하나를 본다. 2층 나무 사이, 열린 지붕 아래 국수 가락을 말리는 곳이다. 들어가 보니 오래된 기계 앞 한 남자가 국수를 뽑고 있다.

 

50년 간 이 집에서 국수공장을 운영한 부부는 매일 1층 집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와 국수 뽑는다. 볕 아래에서 실내로, 다시 또 다른 공간으로. 일주일 간 4번을 옮겨가며 말리는 태양건조국수는 번듯한 홍보 하나 없이도 알음알음 단골들이 많다. 하지만 직원은 오직 부부 뿐.

 

여든을 바라보는 부부의 몸은 조금씩 주저앉고 있다. 국수를 건 나무 대. 수없이 오가다 무너진 나무 계단처럼. 그래도 국수가 장수와 복을 의미해서일까. 50년 국수 공장 하며 부부는 자랑할 일이 많다. 잘 키운 자식 셋도, 유명 야구선수 사위도, 최근엔 서울대 의대에 붙은 손주까지. 열심히 산만큼 복도 많은 부부다.

 

그 때문일까. 여든이 넘은 지금도 부부는 국수 공장을 멈추지 않는다. 쉼 없이 복이 들어오라고. 묵묵히도 국수를 뽑아낸다. 볕에 내놓은 태양건조국수에 작은 태양 빛이 걸린다. 빛을 머금고 반사하며, 바람에 흔들리는 국수 가락이 꼭 부부의 지난 삶처럼 정갈하다.

 

 

홍매화 길목에서 만난 '고향의 봄'

 

4월, 홍매화가 흐드러진 남도의 길을 걷는다. 옥정호 주위를 지나다가 낯선 배 한 척, 막 출발하려는 어르신 한분을 만난다. 고향 집으로 향한다는 그. 사실 어르신의 고향은 너른 옥정호, 물 아래에 있다.

 

1961년 섬진강 댐 공사로 18개의 마을, 2만여 명 가까운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고향 땅을 떠나야 했다. 임실의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상을 약속 받고 부안, 안산 등 간척지로 이주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폐 염전과 갈대밭이 무성한 간척지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도, 사람이 살 수도 없었다. 그렇게 다시, 보금자리를 잃은 주민들은 옥정호 근처로 돌아왔다.

 

수몰민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 고향이 그리워질 때 이곳을 찾는다. 11살 겨울 무렵, 고향을 떠났던 기억이 생생한 최 어르신도 마찬가지다. 고향의 흔적은 나무가 자라고 땔감을 주웠을 산꼭대기만 남아있다. 바로 잠기지 않은, 그 산꼭대기가 지금의 붕어섬이다. 아무 것도 없지만 섬이 된 산에 올라 11살 그때로 돌아간다.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

 

 

'오수의 견'을 이을, 유기견 축구 천재 레오

 

임실 오수면에는 골목마다 유달리 개가 많다. 가로등 아래, 담벼락, 화장실, 다리 입구까지. 온통 개, 개, 개다. 알고 보니 이곳은 충견의 마을.

 

신라시대, 술에 취한 주인이 불이 난 걸 모르고 쓰러져 있을 때 제 한 목숨 바쳐 주인을 살린, 그 전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이 임실군 오수면 출신이다.

 

동물 전용 공원을 지나가다가 특별한 개 한 마리를 만난다. 축구 공 하나로 이리저리, 동네에서는 꽤나 유명하다는 축구 견 레오다. 그 어떤 공에도 유독 축구공에만 반응하는 것이 ‘임실 개의 손흥민’다운데.

 

사실 이 씩씩한 레오는 유기견 출신.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버려져 있던 개 레오가 눈에 밟혔던 주인 신현확 씨는 레오의 가족이 되어줬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였을까. 레오는 타고난 축구 실력으로 더 큰 행복을 선사하는 중.

 

동물과의 진실한 교감은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레오 때문에 경찰직 공무원에서 축산직 공무원으로 진로까지 돌린 그는 지금은 유기견 보호소 센터를 관리하며 임실의 동물 복지에 힘쓰고 있다. 21세기 오수면에서 만난, 현대판 '오수의 견'이다.

 

 

타국살이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40년 김치 수제비

 

강진터미널 부근의 풍경은 참 정겹다. 나지막한 가게들이 옛 간판, 옛 모습 그대로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추억을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강진터미널 근처, 작은 국수 가게는 꼭 한번 들를만한 곳이다.

 

이곳에는 75세 어머니가 매일 구수한 입담과 함께 가게 입구에서 국수를 삶는다. 먼 길 갈 사람들 배곯을까 뭘 시키든 한 대접 가득이다. 주방엔 9년 전 베트남에서 온 며느리 한이(35)씨가 있다. 그녀는 결혼 직후 시어머니의 가게 서빙을 도왔다. 맛보기도 낯선 한국 음식을 처음부터 만드는 건 무리. 그래서 종종 곁눈질로 시어머니 음식을 보고 배웠다는데.

 

그러다가 어머니가 다리를 다친 어느 날, 속전속결 주방까지 진출했다. 제법 음식 솜씨가 있어 이젠 시어머니 손맛을 제법 따라잡았다는 며느리. 둘이 서면 등 닿을 듯한 일자 주방에서 고부는 그렇게 매일 뜨끈한 국수와 수제비를 삶는다.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나지만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는 씩씩한 성격만은 꼭 닮은 고부. 쉬는 날엔 봄 볕, 강 아래 나물을 캔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누가 보면 꼭 모녀 같다. 함께 한 지 10년, 이젠 긴 말 없이도 속내를 다 아는 가족 같다.


작은 마을, 임실에 깃든 평화처럼 아늑한 동네. 정 많고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전북 임실의 이야기는 4월 23일 토요일 저녁 7시 10분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67화 작은 위로와 스쳐가다 – 전라북도 임실] 편에서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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